• 조상의 애국,애족의 민족정기를 계승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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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방한민

아성 방한민

 

운동계열: 만주, 서울

 

1900116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에서 부친 방규석(方圭錫)과 모친 조현정의 차남으로 출생한 방한민선생은 15세 때 공주농학교를 입학하여 3년을 수료한 후, 수원농림전문학교에서 약 1년간 잠업을 공부하였다.

 

이후 19세 때인 1919년 동경 서원(西原)잠계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났으나 1년 후 몸이 아파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하게 되었다. 이 시기 선생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전 민족이 항거한 3.1운동을 겪으면서 항일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20년 선생은 서울로 상경하여 조선일보 창간, 사회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조선민중의 민족적 불평’ ‘골수에 심각된 대혈한의 진수라는 기사등으로 독립운동관련 특종을 수차례 연재하면서 일본인을 왜놈으로 신문지상에 사용하면서까지 일본 군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하며 일제와 친일파들의 죄악상을 폭로 · 단죄하며 민족의 가슴 속에 항일의식을 심어주어 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이로 인해 총독부의 압력으로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고, 이후 동아일보에 다시 입사했지만,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본격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일본행을 결심하였다.

 

선생은 19224월 일본 도쿄에 건너가 니혼대학 사회경제학부에 입학,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뜻을 같이하는 유학생들을 모아 611문화신문을 창간하였다. 선생은 주간을 맡아 조선문화의 창달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마침 19227월 니가타현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대한 진상보도와 유학생 항의 데모를 조직, 일제만행을 규탄한 것을 이유로 요주의 인물로 감시의 대상이 되어 일본을 떠나야 했다.

 

선생은 192212월 잠시 국내에 머물렀다가 이듬해 1월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19237월부터 만주 간도 용정촌 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쇄되자 김정기, 김사국 등과 함께 동양학원을 설립하고 직접 사회학과 경제학을 담당, 민족교육 구국활동을 하였다.

 

192311월 개산툰과 용정간 경편 철도개통식에 참석예정인 조선총독의 주살과 일본은행등에 폭탄을 투척하여 민족봉기의 계기를 시도하다가 거사직전 폭발탄 30개와 선전문 다수가 발각되어 동아일보 지국장 김정기(金正璂) · 김사국(金思國)23명과 함께 일본영사관 경찰에 피체되었다.

 

그는 19231224일 청진지방법원에서 폭발물취제령위반등의 주모자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향 사람들의 탄원으로 192862일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가출옥하였다.

 

1931년초 서울 종로에서 안상훈(安相勳) 사건에 또다시 배후 주모자로 연루되어 423일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로서 방한민선생은 2차례 도합 1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단식하면서 옥중 투쟁을 전개하며 항거하였다.

 

193710월 출옥

일제의 모진 고문 후유중으로 정신이상자 수용소에 들어가 수감생활 을 하다가 해방을 맞음

해방 후 수원농대(서울농대 전신)에서 잠사농업을 강의

인하대학 출범 당시 설립위원으로 참여, 경제학 교수

전북 익산시 완산면에서 고구마 재배법 전수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