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준희
함경북도 회령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 간도에서 한상호 ·임국정 ·최봉설 등과 함께 철혈광복단 에 참여 활동하였다. 1920년 7월에는 북로군정서 특파대장이 되어, 한상호·임국정·최봉설 등과 같이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간도 용정으로 이송중인 현금 15만원을 화룡현 동양리에서 호송일경을 사살하고 탈취하였다
그후 해삼위 신한촌을 근거지로 많은 무기를 구입하였다.
동년 12월 일제주구인 엄인섭 의 밀고로 해삼위에서 한상호·임국정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21년 4월 4일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21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임국정·한상호와 함께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임국정
함경남도 함흥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후 만주로 망명하여 윤준희 · 한상호 · 최이붕 등과 함께 철혈 광복단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남만에 본부를 두고 있던 북로군정서에 가담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간도 와룡동 김하석의 집에서 군자금 모집 방책을 상의했다.
1920년 1월 4일 윤준희· 한상호· 최이붕· 김 준 · 박웅세와 함께 용정촌에서 현금 15만원을 탈취하였다. 같은 달 9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으로 들어가서 체코슬로바키아제 무기를 구입하고 무관학교 설립등을 계획하였다. 1920년 12월 일본경찰의 밀정인 엄인섭의 밀고로 윤준희·한상호 등과 함께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1921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상호
일찍이 간도로 건너가 명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와룡소학교 교사로서 재만한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 윤준희 · 임국정 · 최이붕 등과 함께 철혈광복단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당시 남만에 본거를 두고 있던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였다.
1920년 1월 그는 윤준희 ·임국정 ·최이붕 등과 함께 조선은행 회령 지점에서 용정 으로 운반 중인 현금 15만원을 화룡현 동양리 에서 호송 일경을 사살하고 탈취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으로 들어가서 무기를 구입, 무관학교 설립등을 계획하다가 1920년 12월 일본 경찰의 주구인 엄인섭의 밀고로 윤준희· 임국정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에서 일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청진으로 압송되었으며, 청진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1921년 4월 4일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동지 윤준희· 임국정과 함께 교수형으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강
평양의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교 재학 시 105인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검거의 위험이 있자, 1912년 3월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를 거쳐 하얼빈으로 가 그곳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북간도 지역에서는 간민회 일본조사부원으로 활동하였고, 대동협신회 회원, 동제회 평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대한국민회에서 경호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김강이 활동한 대한국민회는 북간도 4개 현에 거주하고 있는 40만 한국인들을 기반으로 하여 조직된 단체로서 그 지회만도 80여개소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한국민회는 백초구 · 국자가 ·용정촌 · 두도구등의 상업 지역과 주요도시 등을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아울러 대다수 구성원이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기독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 등지에 기본 조직을 갖고 있었다.
대한국민회에서는 통신부원 겸 중부경호부장으로 1920년 11월까지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간도청년회의 발기에 참여하였으며, 의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월에는 간도 15만원 사건에 참여하였다. 이 사건에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등과 함께 연루되어 노령· 간도의 오지로 피해 다니다가 1920년 11월경 연길현 태평구 용포동 부근에서 가납기병연대 에 체포되어 연길현 동불사 북구(北溝)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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